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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집트의 엄청난 보물들

by 케니마케터 2020. 10. 29.

 

거대 건축물 고대 초기의 왕릉이었고 무덤이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무덤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사후세계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무는 영혼의 거처라고 하고 안타까운 것은 도굴을 당하지 않고 남아 있는 피라미드는 하나도 없다는 것에 나는 분노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Egypt Pyramid)는 전 세계 피라미드 중에 가장 유명하다 너무 고래로 부터 유명해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불후의 명작이다 약 4000년 전의 무지 막대한 연대를 자랑하고 고대유적이면서 고대 유물이다

 

수십년 동안의 여행기 중 그 어느 나라을 막론하고 이보다 더 깊은 감동과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격정적인 관광을 해본적이 없다고 단연코 이야기 한다 인간의 위대함에 나는 여행 내내 숙연했고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 여행기간 중 느꼈던 감사함은 나를 일에서 멀어지게 했고 한동안 추억같은 여행의 그림자와 잊지 못해 싸워야만 했다

영화 배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어쌔신 크리드 - 다양한 피라미드가 나온다

 

유명한 스타게이트 - 여기선 우주선 착륙장이 피라미드 모양이다

 

흥행영화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 디셉티콘의 스타 하베스터를 카프레왕의 피라미드가 덮고 있는것으로 나온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와 더불어 이집트박물관을 눈으로 보는 것 만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이집트자유여행 카이로박물관 이집트피라미드 스핑크스의 엄청난 보물들

 

 

피 라 미 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에서 다시 살아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죽은 파라오가 살 사후세계의 큰 왕궁을 짓는다는 사상과 개념으로 살았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무덤으로 설계된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 피라미드만 남아있지만 옛날 오랜 과거의 역사의 잔재로 보면 파라미드 근방에 신전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 피라미드를 둘러싼 긴 벽등이 존재하고 함께 건설되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엄청나게 거대 웅장하며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모습에 놀란다 앞에서 직접보니 혀를 내두를 정도로 컷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큰 사각형의 돌들의 크기부터 장난이 아닌 크기와 공포스럽게 쌓아올려 놓은것이라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이런 건축물의 수평 수직 등 너무나도 정밀하게 높이 쌓아올린 건축기술에 경의심을 느꼈다고 한다 수치적으로 정밀해서 찬탄 찬사르르 자아내게 된다고 한다

 

 

피라미드 모습 인상 자체가 너무 압도적이라 그 시대 그러니까 동시대의 이집트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 국가와 후대의 문명 특히 유럽에 큰 영향을 남겼다 특히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는 2.5톤 무게의 엄청난 사각돌이 300만 개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피라미드가 기원전 2560년에 146m의 높이를 달성하였기 때문에 우리 인류는 무려 3871년 동안 이보다 높은 구조물을 짓지 못했다고 한다 기원 후 1311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의 링컨 대성당의 첨탑이 160 m를 넘겼다

 

 

이런 엄청나고 거대한 피라미드가 수천 년 동안 보존될수 있었던 것은 건축물에 치명적인 물 강수와 식물이 적은 환경의 영향 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조물 크기와 각 부재의 크기가 무식할 정도로 거대해서 그러니까 너무 큰 돌이라 풍화 바람 비 등의 날씨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견딜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보니 실제로 벽돌로 지어진 초기 피라미드는 거대한 돌로 지어진 피라미드보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처음에 지어질때에는 저렇게 우둘투둘 거친 표면이 아니었으며 매끈하게 다듬은 하얀 석회석을 외장으로 사용하여 번쩌거리고 화려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약한 외장은 떨어져 나가고 후대 사람들이 막 돌을 떼어가고 조깨서 다른 용도로 막써서 훼손이 되었고 바람에 저렇게 거친 표면이 되었다

 

 

심지어 피라미드가 지어진 고왕국 당시에도 후대 왕들이 선대 왕들의 피라미드에서 석재를 약탈해서 자신의 피라미드들 짓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옛 석조물에서 새 석조물의 자재를 마련하는 일이 빈번했고 기자 3대 피라미드의 경우 바로 옆에 카이로가 건설되며 외장재 대부분이 벗겨져 카이로 공공건물의 자재로 전용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피라미드라 부르지 않고 메르 (MER) 라고 불렀다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는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다 하지만 너무 큰 크기로 인해 내부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돌이 금이가는 사태 (CRACK)가 발생하게 된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처음으로 화강석을 왕이 안치되는 석실 천장으로 사용했는데 계속해서 금이 가는 것을 보고 겹겹이 5중겹까지 쌓아서 겨우 하중분산을 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가장 큰 이집트 피라미드이고 7대 불가사의의 피라미드라면 이것을 말한다

피라미드는 한동안 무덤으로 쓰인 모양이지만 훗날 고왕국이 쇠락하면서 귀족의 자식이 노예가 되고 노예의 자식이 귀족이 되는 세상이라는 당대의 기록을 볼 때 엄청난 사회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지난 5천 년 중 최악의 가뭄이 닥쳐 어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들을 구워먹을 정도였고 정치적 혼란과 역병도 한꺼번에 겹쳐서 200백 년간 대 혼란에 휩싸인다 덕분에 피라미드 건축물 축조가 어려워지고 훼손이 되고 결국 중완국시대에 석대대신 진흙벽돌로 속을 채우고 포장용 석회암으로 만든 파라미드를 지었다

 

 

스 핑 크 스

스핑크스는 원래는 그리스의 설화와 미술 속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사자의 신체에 인간 여성의 머리 그리고 조류의 날개와 뱀의 꼬리가 달린 짐승으로 주로 묘사된다 이집트인데 아이러니하게 그리스의 신화인 수수께끼의 스핑크스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 밖에서도 사람과 사자가 섞인 동물의 유물은 사자 서식지인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동남아시아 등에서 잘 나타났고 이 유물들은 당시 지역 고유의 신이나 괴물을 묘사한 것이나 기록이 소실되고 이후 재발견 되면서 스핑크스 비슷한 것에 모조리 스핑크스라는 이름을 붙여서 일반명사화되었다

 

 

스핑크스 하면 떠올릴 이집트의 스핑크스 조각은 "기자의 대스핑크스"로 불리는 것으로,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근처에 있다 카프레의 얼굴로 추정되는 사람 머리와 엎드린 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고 그 모습이 웅장하고 거대하다

대스핑크스의 몸 길이는 73미터 높이는 22미터이며, 얼굴 폭이 4미터에, 귀의 길이가 1.4미터, 입의 길이가 2.3미터, 코의 길이가 1.7미터다

머리 부분이 실물보다 10배 크고 동체는 22배 크다

와 대단하다 와우

 

 

돌을 쌓아 만든 피라미드와 달리 스핑크스는 상체와 머리는 석회암 언덕을 깎아서 만들었다 와 정말 대단하다 이걸 깎아서 만들었다구 그냥 헐 그들의 정성에 난 병원 가보라고 할것 같다

몸통은 평지를 파내서 만들었다 이런 이유때문에 일정 세월이 흐르면 사막에서 부는 강한 모래바람에 의해 점점 모래가 차올라 몸통이 잠기게 되므로 지속적으로 관리해 줘야 한다 그리고 몸통 일부분은 돌을 쌓아 만들었고 원래 표면은 짙은 붉은 황토빛깔 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하다 그리고 머리에은 마치 파라오처럼 관을 쓰고 있는 모습 형상이고 현재 코는 사라진 상황이다

 

 

글쎄, 사라진 코의 역사다

사라진 것은 코 외에도 이마에는 왕권의 상징 코브라와 턱수염도 원래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서 없다 에구 어째 아주 수난이구먼

누가 망가뜨렸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과 소문이 나돌고 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왔을때 병사들이 스핑크스의 얼굴을 대포를 쏘아서 망가졌다는 설, 코가 없으면 부활할 수 없다는 고대 이집트의 전설을 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망가뜨렸다는 설, 등이 있다

 

 

적지 않은 창작물 동화 역사소설에서도 코가 부서진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웃긴 개그 코메디 성의 설명을 달아 놓았다

알라딘에서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날라 다니는 알라딘과 자스민을 본 석공이 실수고 코를 깨먹었다고 쓰여 있다 아스테릭스에서는 오벨릭스가 멋모르고 스핑크스를 올라가다가 코를 부셔버렸다고 한다 딱다구리에서는 우디가 시칠리아에서 구두 부츠발로 걷어 차여 날아 가다가 부딪힌 곳이 바로 스핑크스 코였다고 한다

스핑크스에도 많은 미스테리가 있는데, 하나는 스핑크스상의 ""얼굴이 몸에 비해 너무 작다는 점""으로, 원래 사자상 또는 아누비스나, 호루스 등 다른 무엇의 상이었는데 후대에 파라오의 얼굴로 깎았다는 추측도 있다 원래는 전통적으로 "" 파라오의 머리를 한 사자"" 라는 표현 때문에 당연히 사자의 머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이론이 등장했는데, 이후 몸의 비율이나 뒷다리 모양 등을 볼 때 고양이과 보다는 개과일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에 아누비스였음을 주장하는 이론도 등장했다.

다른 하나는 스핑크시 시기에 일반적으로 대형공사가 가능했던 이집트 고왕조로 였다고 추측되고,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앞에 서있었던 이유때문에, 카프레왕이 세웠고 카프레왕의 얼굴을 본뜬 것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처럼 내려왔었다.

호 루 스 신 전

호루스 신전은 매의 머리모습을 한 호루스 신을 모시는 신전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통치기간 (6대에 걸친 왕조)에 지어졌다 호루스와 세티 사이에 치열하게 치뤄졌던 전쟁터 전적지에 신전을 세웠다고 추정하고 있고 현재의 신전은 가장 마지막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건축물과 조형미에 탄복했다

원래의 신전 건축물은 호루스 상의 보호물로 고대의 초원에 세워졌고, 일찍이 지금의 건물 쪽으로 90도 각도로 람세스 2세의 작은 탑문이 있었는데, 열주실을 포함한 주 신전은 1860년 마리에뜨(MARIETTE)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만남의 축연과 호루스와 그의 부인 하토르의 결혼기념일을 묘사한 거대한 부조들이 있다

 

 

이들 부조들은 대부분 첫 탑문 안에 있고 종교적으로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과 연관되어 있다

여름철 세번째 달에는 성직자가 덴데라 신전에 있는 하토르의 범선 위에 그녀의 조상을 모셔두었다가 호루스와 하토르가 부부애를 나누기 위해 찾았던 것으로 믿었던 에드푸 신전으로 가져갔다고 매일 밤이면 신과 여신들이 탄생지(MAMISSI)나 범선의 정박소에서 은거하였다.

 

 

이곳에는 탄생지로 가는 열주로 된 입구가 있으며, 주 신전의 바깥쪽 부조들은 여전히 색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 그림들은 호루스와 하토르의 아들 하르소모투스(Harsomtus)의 탄생에 관한 의식을 묘사한다고 한다 그들의 문화에 경탄스러움을 느꼈다

주 신전의 탑문은 약 36m 높이로 적들과 싸움을 벌이는 파라오의 전투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었고, 탑문 안의 열주 안마당에는 잘려진 원주들이 있고, 안마당 양쪽에 있는 문은 신전 뒷쪽과 벽면 안쪽으로 연결되고, 이곳에는 민간의 기록에서 나온 땅의 기부를 기록하고 있는 비문들과 호루스가 세티에게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극적인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호루스에게 바쳐진 이 신전은 후대에 알렉산더 대왕 휘하에 있는 대장군 PTOLEMAEOS (프톨레미우스)가 세운 PTOLEMAEOS 왕가 시대에 다시 재건축했다고 한다

입구에는 높이 36미터, 폭 137미터의 웅대하고 거대한 탑문이 있었다 그 바깥벽에는 천지창조를 깨우는, 신전의 건축건립 과정, 호루스가 싸우는 모습, 호루스와 사랑의 여신 (HATHOR)의 결혼을 기념하는 모습등을 담은 거대한 돌새김 조형물 등이 남아있다 그리고 탑문의 양쪽에는 아래 위 이집트 매의 모습을 한 한쌍의 호루스 상이 있다

카이로 박물관

현재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은 15만점의 유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그 유명한 특히 1922년 11월에 영국의 카나본경의 대리인 하워드 카터경이 발견한 투타카몬왕의 유품은 세계 강국들에 의하여 발굴되었지만 카이로 박물관의 투탄카몬왕의 유품처럼 전량이 한 장소에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은 전 시계에서 이곳 뿐이다

 

 

파라오는 신의 아들이자 대리자로 이집트를 통치하는 존재였다 절대적인 권력으로 위대한 건축물과 정복 전쟁을 수행했고 나일강을 관리하면서 이집트인들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는 죽어서도 피라미드와 화려한 왕릉무덤에 묻혀 다시 신이 될수 있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런 삶을 살수 있었을까 의아스럽기만 하다

 

 

이집트인들은 내세적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나일 강의 선물> 생각한다 그들의 삶중에 나일강은 매우 중요했다 나라를 보호하고 시민들은 나일강을 통해 거래하고 삶을 영위했다

 

 

왕은 이 강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절대적 왕권이 성립하고 엄하고 무서운 왕이 될수가 있었다 이집트의 땅은 범람하는 강물에 의해 비옥한 토지가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범람과 생활하면서 이 세상의 창조에 대한 신화를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신화에서 지배자의 권위를 빌려올수 있었다

강을 중심으로 도는 자연 속 삶에서 풍족한 풍요를 보장받은 이집트인들은 현세의 삶은 내세에서도 영원할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4000년에 걸친 유물 15만점을 소장하고 있는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

1층은 석상, 석관 등 각종 유물이 시대 순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2층은 투탕카멘의 진귀하고 고귀한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고 대표적으로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황금관, 황금목걸이 등을 비롯해서 많은 그의 유물들이 디스플레이 되어 볼수 있었다

 

 

특히 투탕카멘의 실물크기 이상, 목관, 전차, 장식품 등 2천 여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특별 전시실에는 미이라 람세스 2세의 실제 미이라를 비롯해서 18왕조 부터 20왕조의 파라오 미이라 12체가 있었다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은 파라와와 관련된 유물, 수많은 그의 전시품과 살고 죽었던 흔적들로 가득차 있었다

놀라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카이로에 위치한 이집트 박물관은 많은 혼란과 역경 속에서 세계적인 박물관이 되었다. 1800년 부터 유럽의 강국들은 이집트의 문화 유산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이집트의 고분들과 신전등은 일대 수난과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투탄카몬 왕릉 무덤 발굴때는 이미 고대 이집트의 왕릉 고분 무덤들 약 700-900개가 발굴 훼손된 이 후 였으며 다른 왕과 달리 투탄카몬왕은 소년왕으로서 9세부터 18세까지 단지 9년 정도로 매우 짧은 집정기간이였기 때문에 많은 고고학자와 박물확자들이 무덤이 없을것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수색을 중단한 관계로 유품들이 고스란이 다행스럽게도 이집트에 남게 되어서 역사나 문화적으로 많은 연구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유품중에서 순금으로 되어 있는 미이라관은 당시의 섬세한 세공기술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위의 계란으로 만든 유물은 당시 피라미드로 들어가서 발굴하고 있었던 고고학자와 탐험가들 중 햇불을 켜고 들어가서 이 2개의 유물을 보자마자 너무나도 놀라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카이로 박물관의 수많은 유품들이 고도로 발달된 당시 이집트 예술의 극치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아직도 신비속에 묻혀있는 돌을 다루는 석술은 가히 경이로운 것이다

죽기전에 반드시 필요한 여행지이며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이집트 여행일기를 올려본다

코로나가 끝나면 가족과 다시 한번 여행을 계획을 해볼려고 한다

여러분 정말 세계여행지로 추천을 드리며 일생에서 잊지못할 시간이 될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tw2vfKihXA

 

https://www.youtube.com/watch?v=MWcPNrWNDPg

 

https://www.youtube.com/watch?v=rsv4drcgHys